논문
7세기 후반 신라불교(新羅佛敎)의 정법치국론(正法治國論) 원효(元曉)와 경흥(憬興)의 국왕론(國王論)을 중심으로
저자 : 김상현(金相鉉) ISBN : 1229-0939
발행기관 :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발행년도 : 2007
간행물 : 신라문화(新羅文化) 권·호 : 第30輯 /
페이지 : 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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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아이콘 7세기 후반 新羅佛敎의 正法治國論.pdf
소개
키워드
정법치국(正法治國, Ruling a Nation with Upright Reason), 원효(元曉, Wonhyo), 경흥(憬興, Gyeongheung), 『금광명경』(『金光明經』, Suvarna-prabhāsottama-sūtra), 『왕법정리론』(『王法正理論』, Rājadharma-nyaya-sastra), 『살차니건자경』(『薩遮尼乾子經』, Bodhisattva-gocara-upāya-visaya-vikurvāna-nirdeśs-sūtra)
목차
[국문초록]
[영문초록]
Ⅰ. 머리말
Ⅱ. 왕실(王室)의 불교신앙(佛敎信仰)과 고승(高僧)의 자문(諮問) ]
Ⅲ. 불전(佛典)으로 본 국왕치국관(國王治國觀)
Ⅳ. 맺는 말
초록
중대 초기인 7세기 후반은 삼국통일의 전후기로서 주목되는 시기이다. 본고는 이 시기에 있었던 ‘國王 治國의 일’에 대한 불교계의 논의를 당시의 대표적 고승인 원효와 경흥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신라 중대 왕실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했고, 국왕들은 독실한 신앙자였다. 궁중에는 별도의 사찰인 內院이 있었고, 국왕은 고승을 초청하여 說法을 듣거나 정치적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던 金庾信, 金良圖, 金天尊, 竹旨郞 등도 불교를 신봉했다. 이처럼 신라 중대 왕실과 귀족들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하고 후원했다. 따라서 불교는 통일 직후 三國民의 융합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중대초기의 여러 고승들 중에서도 元曉(617~686)와 憬興(~681~)의 활동은 더욱 돋보인다. 원효는 100종의 저서를, 경흥은 47종의 저서를 각각 남긴 당대 최고의 學僧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신라 왕실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는데, 원효는 무열왕의 공주 瑤石과 결혼했었고, 憬興은 神文王(681~692) 때 國師가 되어 궁중을 출입하면서 조정의 여러 자문에 응했다. 따라서 신라 왕실이 이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의 정치사상과 관련된 내용은 여러 經論에 보이지만, 특히 『金光明經』과 『薩遮尼乾子經』, 『王法正理論』에는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 특히 국왕의 과실과 공덕에 관한 내용이 자세한 편이다. 신라 학승들은 대부분 『금광명경』을 중시했지만, 특히 원효는 2종, 憬興은 5종의 주석서를 각각 지었다. 원효와 경흥은 국왕의 치국과 관련하여 『出愛王經』, 즉 『왕법정리론』에 의하여 이해했다고 한다. 국왕의 10종 과실에 주목하기도 했고, 경흥도 『왕법정리론』의 이 내용을 취하여 국왕의 악을 경계했었다. 이들은 “왕이 만약 과실을 범한다면 큰 창고가 있고, 많은 보좌관이 있으며, 수많은 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존경하며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 대목에도 주목했을 것이다. 원효와 경흥은 『薩遮尼乾子經』을 그들의 저서에 여러 차례 인용한 바 있다. 이경의 詣嚴熾王品 및 王論品에도 왕이 지켜야할 여러 도리에 대해서 설하고 있다. 『금광명경』과 『살차니건자경』에 의하면, ‘국왕은 民의 父母’라고 한다. 그리고 “왕이란 백성으로써 나라를 삼아야 성립될 수 있기에 민심이 불안하면 나라는 곧 위태로워진다.”고 하였다 원효는 이 구절을 주목하기도 했다. 이처럼 『살차니건자경』과 『왕법정리론』 등에는 국왕의 현실 정치에 관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경전을 주목했던 원효와 경흥은 불교의 정치사상, 특히 국왕의 치국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금광명경』에 대한 원효와 경흥의 주석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다른 저술에 인용된 단편적인 글만으로도 이들이 『살차니건자경』과 『왕법정리론』 등에 의해서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심층적 이해를 갖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효 및 경흥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던 중대초기의 신라 왕실이 이들의 불교적 정치사상에 영향 받지 않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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