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금호강 유역 신라 소월리 목간의 ‘堤’와 水利碑의 ‘塢’·‘堤’
저자 : 김재홍 (국민대학교) ISBN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발행년도 : 2021
간행물 : 동서인문 제16호 권·호 : /
페이지 : pp. 161 - 20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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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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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소월리 목간과 수리비의 ‘塢’ · ‘堤’
3. 금호강 유역의 치수와 개발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초록
이 글에서는 금호강 유역의 신라 수리비와 목간에 기재된 ‘堤’와 ‘塢’를 실마리로 하여 수리 기술의 차이를 해명하고 구체적인 수리시설과 대비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 국가가 금호강 유역을 개발하여 마을 경관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금호강 유역의 수리와 관련된 자료에는 ‘塢’, ‘堤’가 표현되어 있다. 청제비 병진명과 무술오작비에는 ‘塢’, 청제비 정원명과 소월리 목간에는 ‘堤’가 보인다. ‘塢’는 하천의 흐름을 막아 가두어 농경지로 물을 대는 洑나 하천의 흐름을 막아 농경지를 보호하는 堰에 해당하는 수리시설이다. ‘제’는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을 가두어 두다가 목통으로 농경지에 취수하는 수리시설이다. 오는 중국 남조의 수리시설이고 제는 북조의 수리시설로 보인다. 금호강 유역에서 木桶은 ‘排堀里’로 표현되어 있다. 塢와 堤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목통의 유무였던 것이다.
금호강 유역의 堤와 塢는 계곡 사이를 흐르는 하천에 있었으며, 그 기재 방식이 ‘○○村 ○○谷’으로 보아 곡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제와 오를 통하여 곡간이 개발되면서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호강 유역의 지류를 흐르는 물길을 막아 농경지로 취수하는 洑형의 ‘塢’, 堤형의 ‘堤’는 마을의 경관을 변화시켰다. 하천 주변의 농경지에 물을 대어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마을이 성장하고 있었다.
금호강 유역에 있는 수리시설은 축조 기술에 따라 제와 오로 구분되지만, 堤塢는 국가 차원에서 직접 축조하였다. 법흥왕 18년 기사의 ‘有司’나 청제비의 ‘使人’이 주관하였다. 신라 중고기 금호강 유역의 수리시설은 국가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농경지의 개발도 국가가 주도하였다. 신라 역사에서 ‘6세기 대개발“이 시작되었으며, 금호강 유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소월리 목간과 수리비의 ‘堤’와 ‘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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