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설총의 ‘압량 출생설’에 대한 비정(批正) -압량의 3 성현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중심으로
저자 : 박순교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ISBN :
발행기관 : 대구경북연구원 발행년도 : 2021
간행물 : 대구경북연구 제20권 제2호 권·호 : /
페이지 : pp. 1 - 36 (36 pages)
첨부파일
첨부아이콘 설총의 ‘압량 출생설’에 대한 비정(批正)압량의 3 성현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중심으로.pdf
소개
키워드
#김춘추. 압량. 설총. 삼성현 #원효
초록
본 논문은 압량의 3 성현 중 설총의 출생 문제를 집중 검토하였다. 설총과 압량과의 관계는 19세기 말 이전에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조선말 압량의 사족에 의해 설총의 유천 출생이 처음 피력되었다가, 국망 이후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여 더욱 깊은 유곡 골짜기에 신도비를 건립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곡 출생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는 일대 사족이 조선 멸망을 전후하여 경주에의 속박을 벗고 일대의 문풍을 진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설총을 유학의 종주로 추앙하며 벌어진 일이라 보인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만남은 삼국 전쟁이라는 시간, 서라벌 도성이라는 공간, 김춘추의 개입과 같은 권력 요소 등이 얽혀 있었고, 압량과 깊이 연계되어 있었다. 압량은 김춘추, 김유신으로 상징되는 세력의 집권 전단을 열었으며, 중대 통일 정권의 등장을 추동케 한 정치적 교두보였다. 압량은 김춘추의 집권 과정에서 추동력을 북돋운 힘의 원천, 중대를 창출케 한 세력 본산이었다. 원효와 요석궁 공주의 만남은, 압량에 정치적 은혜를 입고 부채의식을 품은 김춘추, 김유신이 압량 출신의 원효와 연대를 꾀한 선상에서 이뤄진 정치적 연대와 제휴였다. 그런 만큼 김춘추의 첫 외손자(생존)인 설총의 출생은 초미의 긴요한 사안이었다. 이에 그의 출생이 궁벽한 압량에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통일의 거점, 중대 신라 왕실의 배태지라는 거대한 역사적 함의를 외면한 채, 근거가 박약한 3 성현(특히 설총)에만 매몰된 경산의 현 전략의 모호함과 부재에 관하여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압량에의 새로운 정의가 내려질 필요가 있다.
다음글 : 설총 화왕계의 가치와 스토리텔링
이전글 : 팔공산 선본사 관봉 석조여래좌상 및 삼층석탑의 석재에 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