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三國遺事』의 高麗 睿宗代 佛牙 將來 記錄과 그 將來者에 대하여
저자 : 이진한 ISB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발행년도 : 2018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제79호 권·호 : /
페이지 : pp. 129 - 16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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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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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고려 睿宗代에는 송이 고려와 연합하여 요를 제압하려는 외교적 전략에 따라 중요한 문화적 산물을 주어 고려의 환심을 사고자 했기 때문에 고려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하여 불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불아를 송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러한 불아의전래 과정과 고려에서의 관리에 대해서는 『三國遺事』의 「前後所將舍利」조에 실려있는데, 그것을 가져온 고려의 사신은 정극영이라고 하였다. 반면 『高麗史』에는 왕자지가송에서 불아를 가져왔다고 하였다. 양 사서의 차이를 비교해보건대, 『高麗史』의 睿宗代 기록이 예종 사후 편찬된 『예종실록』을 인용한 것이 많았고, 『三國遺事』의 설화적인내용과 달리 간결하게 예종, 인종, 명종 등의 불골(佛骨) 관련 의식을 적었으므로 『高麗史』 기록의 신빙성이 더욱 높다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정극영이 불아를 가져왔다고 『三國遺事』에 전하는 것은 인종 초 정국의 변화에 따라 두 인물의 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종 말에 죽은 왕자지는 사돈인 이자겸 덕분에 예종묘정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으나 이자겸 몰락 이후 배향이 철회되었다. 그에 반해 정극영은 이자겸의 반대 세력인 한안인의 당여라고 하여 1122년 말에 유배되었으나 1126년 이자겸의 난이 평정되고 나서 사면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불아를 가져온 것에 기억에도 영향을 끼쳐서, 왕자지의 역할은 사라지고 정극영이 그 일을 한 것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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