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청도 운문사 작압전 석불좌상과 석조사천왕상에 대한 고찰
저자 : 최성은 (덕성여자대학교) ISBN :
발행기관 : 신라사학회 발행년도 : 2020
간행물 : 신라사학보 제50호 권·호 : /
페이지 : pp. 395 - 434(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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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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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운문사 창건과 중건: 신라하대~고려시대
Ⅲ. 작압전 석조사천왕상과 석불좌상의 편년과 배치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초록
운문사 작압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좌상과 석조사천왕상은 지금까지 태조 왕건의 후원에 의해 청태 4년(937)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것은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 의거한 것으로서, 당에서 귀국하여 봉성사에 머물던 보양조사가 태조 왕건에게 전술의 비책을 알려줌으로써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고, 이후 보양조사가 대작갑사로 옮겨 무너진 전탑(黃塔)을 다시 세우고 주석하던 중, 삼국통일을 완성한 태조가 밭 500결을 하사하고 ‘운문선사’라고 사액하여 운문선사가 크게 중창되었다는 내용에 근거하여 그 시기를 조성시기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작압전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납석제사리호의 명문에 의하면 咸通 6년(경문왕 5년, 865)에 탑의 수리가 이루어 졌으며 원래의 작탑에서 지금은 ‘작압’이라는 현판이 달린 목조건물의 형태로 바뀐 작압전의 전신이 塼塔이었음이 알려져 있다.
작압전의 사천왕상은 신라하대 석탑과 승탑에 부조된 사천왕상들과의 비교를 통해, 860~880년대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탑 남면과 북면의 초층 탑신 탑문의 좌우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 구의 사천왕상의 크기는 두 구는 151-152㎝, 두 구는 161~162㎝ 이므로 두 구가 한 쌍이 되어, 동방 지국천왕-남방 증장천왕-서방 광목천왕-북방 다문천왕이 시계 방향 순으로 배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천왕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되어 왔던 석불좌상은 2007년 얼굴에 덮혀있던 호분이 제거되고 보수되어 原 모습을 알 수 없으나, 광배와 대좌의 형태면에서 신라하대~고려초기 불상으로는 편년하기 어려운 요소가 발견된다. 가로(橫)로 긴 육각대좌는 상대 연화좌의 연화문에 여의두문과 유사한 세 개의 꽃머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나말 여초 석불 대좌에서 발견되는 중대석 받침(괴임석)이 보이지 않으며, 광배는 2중원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성으로 化佛과 초화문으로 장식된 나말여초 석불의 광배와는 차이가 크다. 조형적인 분석을 통해서 석불좌상의 조성시기는 고려중기 왕실과 긴밀하게 활동했던 학일선사가 운문사로 하산하였던 12세기 전반 무렵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는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도선에 대한 현창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때인데, 운문사의 전탑이 청도지역의 비보사탑으로 새롭게 보수되고 사찰의 중창이 크게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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